스토리와 담론
모든 내러티브는 시간의 두 가지 연속체, 즉 플롯 사건들(스토리)에 의한 시간의 연속체와 그 사건들이 텍스트를 통해 제시될 때(담론) 사용되는 시간과의 접점들로 구성된다. 내러티브 예술가들은 담론과 스토리 사이의 불일치를 강조할 수도, 은폐시킬 수도 있다. 메츠는 ‘거대 통합체’ 개념을 들어 고전영화에서 시공간적 연속성을 서술하기를 시도한다. 각각의 결합 단위들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 즉 ‘스토리’의 토대를 전제로 하며, 그 토대로부터 취사선택하여 영화 텍스트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고전 영화는 리얼리즘 소설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의 생략을 통해 무의미한 시간을 건너뛰며, 생략은 디졸브나 페이드에 의해 매끈하게 처리된다.
오늘날 내러티브는 세 가지 시간성 (스토리의 시간, 담론 속의 시간, 그리고 담론을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정립된다. 쥬네트는 문학 텍스트 속에서 스토리 시간과 담론 시간의 길이를 비교하는 일이 까다롭다고 언급한다. 독서 시간은 개인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독서 속도를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비교가 영화에서는 덜 까다로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시간과 담론을 정확히 일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단일 숏 시퀀스의 경우에도 겉보기보다는 복잡하다. 달력이 넘어가는 모습이라든지 시계가 빠르게 가는 모습 등은 같은 영화에서 상이한 두 역사적 시대를 포함하기도 한다.
쥬네트는 스토리와 담론의 시간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정지’는 서술적 시간은 흐르지만 스토리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장면’에서는 서술적 시간과 스토리 시간이 동일하다. ‘요약’에서는 스토리 시간이 서술적 시간보다 길다. 그리고 ‘생략’에서는 스토리 시간은 흐르지만 서술적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마지막의 슬로 모션으로 된 장면의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문학전통에서 그러한 예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한다.
영화는 스토리 및 담론 시간관계에 있어서 모든 측면을 활용할 수 있다. 극도의 압축-<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는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역사를 영화시간 2시간 안에 다룬다. 또한 2시간 동안 대화만 오가는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는 저녁 식사 시간과 대충 일치한다. 또한 담론 시간이 스토리 시간보다 훨씬 길게 할 수도 있다. <올빼미 강 다리에서 생긴 일>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찰나에 불과한 스토리 시간을 30분 동안의 영화적 서술로 늘어뜨린다. 또한 영화는 고속 촬영을 통해 움직임을 빠르게 할 수도 있고, 저속 촬영에 의해 움직임을 느리게 할 수도 있다.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슬로모션 시퀀스는 속도가 변칙적인 복합 리듬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지 어휘만을 사용해야 하는 험버트는 영화의 ‘환상적인 동시성’을 탐냈는데, 그는 영화가 지닌 비동시성의 잠재력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시간들을 혼용할 수 있는 능력 역시 부러워했을 법하다. 영화는 순전히 언어적인 매체에서는 향유할 수 없는 시간들을 배치시킬 수 있다.(p203-209)
영화와 소설에서의 템포
예술가는 이야기의 템포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중요한 사건들만, 그리고 이들 사건들의 중요한 측면들만 기대한다. 하지만 문학적 내러티브는 이야기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의 개념을 꾸준히 재정의해 왔다. ‘식사 시간들’은 플로베르가 그것들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놓기 전까지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못했을 것이고, 조이스가 사소한 정신적 영역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소재로 끌어들여 놓은 것은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 반면 주류 영화에 있어서 내러티브 시간의 관습은 상당히 구식상태로 머물러 있다. 오락성을 전재하는 상업영화는 잘 팔리는 시간성의 개념으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습관적인 관습들에 대한 전복 활동은 주로 아방가르드 영화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집단의 영화작가들로부터 나온다.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는 빌딩만 보여주는 영화로서 정적인 숏들이 460분 동안 이어진다. 이러한 과격하고도 도발적인 방식으로 기록대상의 시간과 서술시간을 일치시킨다. 영화의 느린 리듬은 상투적인 영화의 빠른 속도 및 넘치는 사건에 익숙해 있는 관객들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영화와 소설에서 템포의 문제는 사건의 중요성과 그 사건에 할당된 시간의 관계 이상으로 미묘한 문제다. 소설에서 감지되는 시간의 지속감은 구문 정보의 밀도, 어조의 듣기 좋음 따위에 밀접하게 의존한다. 또한 상상의 흐름을 쫓는 에세이식 문체는 내러티브의 흐름을 지연시킨다. 역사적으로 소설은 시간을 세련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템포의 문제는간단하지가 않다. 영화에서 템포의 문제는 스타일 몇 편집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템포는 숏의 빈도, 카메라 각도 및 렌즈 변화의 정도, 그리고 사운드 트랙의 복합성에 따라 달라진다. 정적인 숏일지라도 그 숏이 전달하는 정보의 밀도에 따라 ‘속도감’이 달라진다. 또한 시간의 지속감은 사운드 트랙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중요한 점은 영화의 시간이 완전히 가공된다는 사실이다. <전함 포템킨>에서 그 유명한 유모차는 마치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하듯 계단 가장자리에 걸려 기우뚱거리며, 에이젠슈테인은 오데사 주민들조차 알아볼 수 없게 오데사 계단을 늘어뜨려 놓는다. 대개 이런 식의 조작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표시 나지 않게 감추어진다. 단지 자의식적 예술가들만이 이러한 조작을 겉으로 드러낸 뿐이다. (p209-213)
자막, 중간 자막
<조셉 앤드루스>에서 헨리 필딩은 그 스스로가 소설 작업에 있어서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부르는 것, 즉 권과 장으로 소설을 나누는 관행에 관해 생각해 본다. 그는 권 사이의 공간을 독자들을 위한 휴식처로 보았지만, 별안간 책의 분할을 고기를 토막 내는 푸주간의 행위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책 분할의 작위성을 드러낸다.
무성영화는 자막의 비현실성과 자막 뒤에 깔려 있는 시간적 관습들을 자주 활용하였다. 무성 영화는 동시음에 의해 제공되는 보다 완전한 모사성을 누릴 수 없었기에, 어느 면으로는 반환영성보다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었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 <항해사>에서 나오는 자막(10초 뒤)는 시간의 생략을 설명해준다. 또한 <백인>에 나오는 자막은 스토리 시간과 이야기체 시간의 비동일성을 훌륭하게 강조한다.
크리스티앙 메츠에 의하면, 소설이 단어보다 길고 책 자체보다는 짧은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여 장을 만들어 냈듯이, 영화 역시 숏보다 길고 영화 자체보다 짧은 단위가 필요해 시퀀스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그러한 비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 장의 표제어들은 통일성도 없고, 내용도 일치하지 않는다. 많은 고다르 영화들은 쥬네트가 말하는 “정상적인 시퀀스”(스토리와 담론의 시간이 서로 동일하게 진행되는)와 시간성이 거의 없는 논리적 진술들을 뒤섞어 놓는다. (p21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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