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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송 이론 및 비평/영화 리뷰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 새로운 언어를 통해 행해진 창작과 비평

 

영화는 새로운 언어다. 문필가가 펜으로 글을 적듯 영화작가는 카메라로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런 담론은 영화가 시각과 스토리의 직접적 요구에서 벗어나면서 마치 언어처럼 미묘하고 유연한 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카메라 만년필론’이라 부르는데, 프랑스의 감독 겸 평론가 알렉상드르 아스트뤼가 주로 주장했다. 이런 배경에 아녜스 바르다와 그의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가 놓여있다. 아녜스 바르다는 기존 영화진영에 저항하며 독립적인 영화제작을 시도했다. 그는 다수의 에세이 영화를 제작했는데, 특히 영화와 글쓰기를 접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시도는 영화를 단지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으로 규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먼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관객은 그림 하나와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를 본다. 처음 관객은 이삭 줍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이미지에 매혹될 것이다. 감독은 매혹의 시각에서 벗어나면서 의식적으로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현재 여러 곳에서 음식(물건)을 줍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의 이야기는 시각과 스토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감독의 의식적인 사고와 물음을 통해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진행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동시에 읽어야 한다. 영화 창작과 영화 비평이 함께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창작이란 어떤 이미지(혹은 이야기)를 포착하고 기록하는 거고, 비평이란 포착된 이미지(혹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성찰하고 분석하는 거다. 그의 영화는 바로 이 두 지점이 연결돼 순환한다. 즉, 어떤 이미지를 기록하고 포착하는 동시에 성찰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바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다. 한 예로, 영화 중반부에 포도를 자유롭게 따게 하는 농장주를 인터뷰하다가 어느 순간 농장주의 조상이 초기 영화 작업을 했다며 그 작업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기존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창작과 함께 이뤄진 비평의 지점은 단지 근시안적인 걸 넘어서 세계의 표면과 배면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작업에 대한 물음 혹은 성찰을 수행하는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전제로 창작과 비평의 지점을 단순화하면, 카메라를 통해 기록되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창작’이라 할 수 있고, 이미지를 분석한 뒤에 입혀진 내레이션을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 두 지점이 순환된다. 하지만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두 지점은 때로 일치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창작과 비평의 지점이 일치하는 순간에서 감독은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중복해 표현한다. 상자를 여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내레이션으로 상자를 연다고 설명한다. 이와 반대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순간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할 때도 있다. 감독이 춤을 추고 있다고 말로 설명하지만, 이미지는 단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창작과 비평이 어긋나는 순간이다. 감독은 이 경계를 가시화하면서 관객에게 생각할 지점을 던진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감독 본인의 자기반영성을 전제로 역사와 사물에 대한 성찰과 판단을 수행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영도성’을 성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카메라 만년필, 카메라 비평의 계보에서 눈여겨봐야 할 영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