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감독의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일본의 전선에 투입된 조선 학도병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경계’라는 단어로 압축해 표현할 수 있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지리학적 경계와 인종적 경계로서, 조선 학도병들의 삶, 그리고 조선 남성과 일본 여성의 사랑을 보여준다. 시기적, 정치적 경계로는, 영화가 제작된 시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1960년대는 ‘비상사태’였지만, 아이러니하게 한국영화계는 황금기였다. 즉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수많은 경계에 서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가 만들어졌을 당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때는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꽃을 피웠던 시기인 동시에, 그 꽃이 처참하게 짓밟혔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정변’ 이후, 연이어서 헌법을 개정하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공표한다. 폭력의 역사와 저항의 역사는 동시에 일어난다. 저항, 혁명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법의 힘, 개헌, 그리고 비상계엄,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국영화는 황금기를 맞는다. 법 개정, 검열과 같은 여러 탄압을 봤을 때,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당시 영화계가 살아있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감독들은 저항과 투쟁의 매체로서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다. 유현목의 ‘오발탄’은 김주열의 시선에 박힌 최루탄을, 그리고 4.19의 그늘을 드리운다. 마찬가지로, 김기영 감독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이 비상사태는 현재까지 계속되는 역사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에 의하여’에’ 따르면, ‘역사를 돌아보면, 비상사태가 상시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시대, 비상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매카시즘의 공포를 조장하는 정부, 그리고 그 공포를 확산하는 미디어는 비상사태의 역사를 지지한다. 지금을 박정희 시대의 연장선상의 역사로 본다면, 현시대의 정치적, 비판적 영화를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영화의 내용적인 면에서 살펴보자면, 조선학도병인 ‘아로운’은 일본 군대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이유 없는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똥 묻은 구두를 핥고, 개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군인으로서 대접은 고사하고,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로운’은 꿋꿋하다. 고년병들과 밥이 다르다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면서, 공평하게 밥을 받아내기도 하며, 자기를 구타했던 모리를 고발하여 역공한다. 때때로 영창이라는 벌이 주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아로운’을 통해, ‘조선인’의 긍지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의미는 ‘아로운’ 혼자 힘으로 생기지 않는다. 김기영 감독은 학도병 ‘아로운’을 다루면서 다른 인물과 양식을 적절히 활용한다. 바로 일본 여성 ‘히데코’라는 인물과 ‘히데코’를 향한 고백적 양식이다. 여기서 히데코는 ‘신여성’의 계보에 있다. ‘히데코’는 고정 관념화된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사랑을 쟁취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다. 목욕탕에서 일본 풍습이라 속이며, 아로운의 때를 밀어주기도 하고, 결혼 풍습을 설명하며 ‘인종’은 사랑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히데코가 유의미한 인물인 것은 ‘인종’이라는 경계에서 이 경계를 깨트리는 것과 ‘고백’이라는 양식을 통해 남녀의 권력관계를 바꿔놓았다는 데에 있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연인 관계의 방식은 아로운이 히데코에 자신이 일본군에게 구타당하고 학대받은 것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 아라온이 구타당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국의 여성과 식민지 남성으로 그 대상을 바꾸어 남성을 고백하는 자리에 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지 남성의 여성화를 보여주고, 이후 연속적 고백과 육체관계를 통해 남녀가 이 권력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바꾸는가를 보여준다. 고백과 진실과 섹스가 식민지 담론으로 배치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의 역사가 1960년대에 왜 기술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영화가 만들어졌을 시기적, 정치적 상황에서의 경계, 내용적인 부분으로는 인종에서의 경계,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수많은 경계에 서있는 영화다. 이런 ‘경계’의 기억을 불러오는데, 항상 식민의 기억과 함께 불러온다. 식민의 기억은 역사상 가장 많은 경계에 서있는 시점이었다. 이 경계에서 조선인들의 선택은 제국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영화를 보면 조선과 일본이라는 경계 속에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다. 영화 대사 중, 50년 전통을 강조하는 대사가 여럿 나온다. 그 전통은 무자비한 통치의 수단일 뿐이다. 즉 일본은 전통을 앞세워 복종을 강요하는 나라인 것이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강조하는 ‘전통’을 박정희 시대에 대입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조희연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합리적 합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았고, 식민지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겪으며 전통화된 지배의 단절이라는 조건이 있으므로, 동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전통화된 지배의 단절을 가볍게 뛰어넘고, ‘경제’라는 이전에 없던 전통을 내세워, 복종을 강요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 나오는 ‘모리’의 전통과 다를 게 없다.
이렇듯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경계선상에서 많은 의문을 던지는 영화다. 비상사태와 황금기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일제강점기가 비상사태인 1960년대 들어서 어떤 방식으로 기술되는가. 또, 영화는 조선과 일본이라는 경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가.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에 주목해 볼 만하다. 이러한 의문들은 한국, 아시아, 세계의 역사를 맵핑 하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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