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일요일>과 <휴일>을 연결 짓는 이미지는 붕괴 순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1947년 작품 <멋진 일요일>과 이만희의 1968년 작품 <휴일>, 두 작품은 지리적은 물론이고, 시간적으로도 동떨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두 작품은 구조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포착하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도 비슷하다. <멋진 일요일>과 <휴일>이 각 시대의 공기를 어떻게 포착했는지, 그 공기는 어떠한 시점에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자.
<멋진 일요일>, <휴일> 모두 일요일 하루 동안의 일이다. 즉 두 영화의 구조적 유사성은 ‘일요일 하루’라고 볼 수 있다. 일요일이란, 일반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는 날, 쉬는 날이지만, <멋진 일요일>의 남자 주인공 유조와 <휴일>의 남자주인공 허욱은 일요일에 불안감과 좌절감이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인공의 이러한 감정은 일요일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심리적 붕괴의 상태로 이끈다. 이들 붕괴의 핵심은 가난, 돈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초반부분 주인공이 등장은 붕괴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멋진 일요일>의 주인공은 떨어진 담배를 주워 피우려다가 포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휴일>은 담배를 피기 위해 공갈을 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두 영화의 장면은 유사하다. 심리적 붕괴뿐만 아니라, 두 영화의 풍경 또한 붕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멋진 일요일>은 전후의 분위기 속에서 거리를 중심으로, 무너진 건물의 이미지, 텅 빈 공연장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비슷하게, <휴일>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유신의 그림자가 무르익는 박정희의 시절과 맞물려, 거리를 중심으로, 거센 모래바람의 이미지, 공사장의 이미지로 영화를 구성한다.
<멋진 일요일>와 <휴일>의 붕괴 이미지는 ‘미국화’라는 큰 맥락에 맞물려 있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유사점인 ‘일요일’이라는 날짜만 생각해도 그렇다. 정기적으로 쉬는 날, 일요일은 원래 한국과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는 19세기 중반에 메이지 일왕이 정권을 잡으면서,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한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인들에 의해 1895년 4월에 강제로 실시된 을미개혁 때 양력을 사용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지금의 일요일같이 절대 휴일의 개념이 없었다. 정기적으로 쉬는 날 속에서 붕괴를 느끼는 상황 자체가 근대적인 경험인 것이고, 크게 봤을 때, 미국화의 맥락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후, 냉전의 흐름 속에서 일본과 한국은 엄연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주인공은 미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오히려 찬양한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동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미국의 이미지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멋진 일요일>의 거리의 풍경, 카페의 이미지, 지휘자가 된 유조의 미완성 교향곡 등을 들 수 있고, 마찬가지로 <휴일>도 카페의 이미지, 양주를 마시는 술집의 이미지, 종소리 등을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멋진 일요일>의 유조와 애인 마유코는 최종적으로 저렴한 커피를 파는 과제 가게를 창업하고 싶어 하고, <휴일>의 허욱과 지연은 눈치안보며 커피숍에 가는 것을 원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허욱은 거리를 쳐다보며, 커피를 마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화’라는 맥락 속에서 두 영화는 붕괴의 지점을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멋진 일요일> 전후 냉전의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휴일>은 서양을 모방하면서 시작된 경제개발 바람과 유신의 그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에 의해 붕괴지점이 만들어졌지만, 이들은 미국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을 이용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며, 각자의 방법으로 이러한 붕괴를 무력화시킨다.
<멋진 일요일>과 <휴일>의 남성 주인공이 마냥 붕괴해버리는 무력한 이미지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남성 주인공을 구원하는 존재로서 여성 주인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멋진 일요일>의 유조가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하는 과정에 있어서, 마유코의 가난한 연인들에게 희망과 살길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은, 자기 자신의 붕괴를 막으며, 유조의 붕괴를 막아주는 존재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휴일>의 지연은 자기 스스로 담뱃불 하나 못 붙이는 허욱의 담뱃불을 붙여주는 존재로 기능할 뿐, 자신의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뒤로 숨을 뿐이다. 하지만 결국 죽음으로써, 허욱을 붕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허욱의 분노로 표현된다. 지연이 죽고 나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허욱의 분노는 허욱에게 돈을 도둑맞아 주먹세례와 발길질로 앙갚음을 하던 친구마저 압도시키고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이러한 시대에 대해 두 영화 모두 분노한다. <멋진 일요일> 커플의 분노는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하는 방향이었다면, <휴일> 커플의 분노는 죽음으로서 표현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휴일>은 검열로 인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잘려나갔다. 잘려나갔다고 알려진 장면은 허욱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이다. 즉, 허욱과 지연은 모두 죽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무력하고 허무한 정서라고 단언하기에는 주저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희망이든, 혹은 절망이든, 단순히 붕괴, 또는 무력감을 뛰어넘어 더 높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떠한 방향이든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멋진 일요일>에서 미완성 교향곡의 지휘, <휴일>에서 무력해 보이는 죽음은 당시 사회를 고발하는 장치로서 저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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