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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송 이론 및 비평/영화의 이해

이념의 통로로서 영화와 혁명적 움직임

영화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영화란 움직이는 이미지로 이뤄진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다. 이 스펙터클은 아무 의미 없는 이미지 조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미지 사이에는 우리가 어렴풋이 알거나 봤던 ‘이념’이 녹아들어 있다. 바디우(Badiou)는 “영화란 이념의 상기에 바쳐진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념을 영어로 번역하면 Ideology(이데올로기)다. 추구하는 가치와 준수할 규범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일정한 세계관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반공 이데올로기’ 등을 우리는 숱하게 들어왔다. 이 개념이 좋든 싫든지를 떠나서 이념 없이 사회는 존속될 수 없다. 어느 사회든지 누구나 이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의 상기에 바쳐진 예술”로서 영화는 어떠한가? 영화의 이념은 ‘예외적인 것의 이념’인가? 이념의 통로로서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묻고, 영화가 이념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 기능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는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예외를 숨기고 기존의 이념을 공고히 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 영화’하면 대표적으로 구(舊) 소련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을 떠올리게 된다. 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혁명을 다룬 <전함포템킨>(1925)과 1917년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을 기념하며 만든 <10월>(1927)이 잘 알려진 그의 역작이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영화로 민중을 교화하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영화 이미지로 레닌, 볼셰비키, 민중의 혁명적 힘을 보여준다. 특히 이런 이미지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강조되곤 한다. 몽타주란 서로 관계 맺지 않은 상이한 컷을 교차로 연결해 새로운 의미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 유명한 영화 <전함포템킨>의 ‘오데사의 계단’ 장면은 이런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다. 이 장면은 시민을 학살하려고 온 군대와 도망가는 시민, 그리고 계단에서 홀로 떨어지는 유모차에 탄 아이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다.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감독은 서로 다른 장면과 얼굴을 편집하면서 더 위험한 것처럼 상황을 연출한다.

비슷하게 영화 <10월>에선 가만히 앉아있던 사자 동상이 일어서고서 포효를 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는 서로 다른 사자 동상을 교차 편집하면서 연출한 것이다. 서로 다른 컷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를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혁명적 주체의 표현방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혁명의 의미를 쉽게 전파하려고 했다. 이로써 영화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 연장선에서 지금 상황으로 본다면 그의 영화가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담아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소비에트 정부 시절에 이 영화는 과연 ‘예외’적인 것의 이데올로기였을까? 애초에 혁명을 기념하며 만든 영화는 그 시작부터 예외적이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지 못할 운명에 처해있는 게 아닌가. 기존의 이념을 공고히 한 또 다른 인물과 영화가 떠오른다. 나치를 찬양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과 그의 영화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도 그랬다. 러시아 혁명과 나치즘을 역사적으로 비교할 수 있느냐 하는 논의를 벗어나 생각해보면, 그 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레니 리펜슈탈 또한 영화사를 통틀어 영화 미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영화에 담아내지 못했다. 기존의 이념을 공고히 하고 전파하는 것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드러내는 영화는 없을까? 프랑스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Nouvelle Vague)에서 그 움직임을 찾아본다. 새로운 물결(New Wave)이란 의미를 지닌 누벨바그는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62년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주제와 기술 면에서 혁신을 추구했다.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에릭 로메르(Eric Rohmer),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등의 감독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감독마다 각기 다른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기존 영화 관습을 전복하려고 여러 영화적 실험을 보여준 것,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보다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 누벨바그의 비슷한 지점이다. 이들 감독은 사회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려는 목적보다 개인의 목소리와 역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렇게 하면서 영화는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만들어냈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와 일본인 건축과의 이틀 동안의 만남과 사랑을 다룬다. 큰 사건을 겪은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영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변화나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여자 주인공이 잔잔한 목소리로 히로시마에 대한 과거 기억과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읊조릴 뿐이다. 앞서 소개한 영화에선 개인보다 사회를 우위에 뒀다면 누벨바그는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한다. 이러한 변화를 예외적인 것으로 본다. 예외적인 것의 이념은 정형화되지 않고 불균질한 어떤 것에서 나올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과감한 영화적 실험과 함께 개인의 진지한 이야기에 집중했던 누벨바그는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사회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이전에 사회와 개인 그 자체를 나뉘고 대치되는 개념으로 볼 수 없다. 이 둘은 서로 순환하고 있기에 사회와 개인 모두 중요하다. 다만 혁명은 시민 개개인이 모여서 이뤄지는데, 혁명 이후는 그 개인이 커다란 사건에 너무 쉽게 잊히거나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역사를 들여다볼 때 영화는 예외적인 것의 이념을 진정으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또 다른 혁명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이념의 통로로서 영화와 그 혁명적 움직임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