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의 가장 직접적이고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도덕적 판단을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작부터 자신들과 타인들을 성격화하기 위한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추상개념의 어휘를 사용한다. 도덕적 형용어구는 처음부터 현저하게 빈번한데, 사람들은 ‘정직한’, ‘순결한’, ‘존경할 만한’, ‘흥미로운’ 이들이며, 아니면 그들은 ‘가짜의’, ‘끔찍한’, ‘야비한’, ‘잔인한’, ‘포악한’ 이들이다. 형용어구는 서사시에서만큼이나 멜로드라마에서 거의 정형화되어있다. 단순한 성격화-인물을 위한 기호-인 형용어구는 연극의 구조와 주제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물론 미묘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한 사람 고유의,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덕적 본성을 말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행동과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특히 악한의 역할에서 현저하다. 악한은 어떤 지점에서 항상 그의 악한 본성과 의도에 관한 진술로 갑자기 나타난다. 그와 같이 명백한 진술과 악에 대한 찬양은 연극 후반부에서 또 다른 독백으로 이끈다. 그 독백에서 악한은 자신의 파멸, 즉 악과 완전한 일체화를 이룬 자신의 덫을 깨닫고, 심지어는 뒤늦은 양심의 가책을 표현한다. 비극의 독백은 내분을 겪고 있는 마음, 즉 선택이 불가능하면서도 절대필요한 상황의 딜레마, 그러니까 고뇌에 찬 내성을 외면화했다. 그런데 멜로드라마에서의 독백은 순수한 자기표현,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도덕적, 감정적 정수를 통해 자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만약 악한이 도덕적 성격의 흑백이 가장 극명히 표현되고 구성상 당연히 양극화된 위치를 분명히 표현하는 인물이라면, 여주인공은 외견상 반대로 보여도 순수성을 가진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표현해야 한다. 자기표현의 특유한 그리고 매우 의미심장한 변형태는 멜로드라마 전체에 걸쳐 울려 퍼지는 자기지명의 행동이다. 이는 진정한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위장과 수수께끼를 헤치고 나아가는 행동이다. 가지각색의 형식으로, “나는...그 사람이다...”라는 진술은 거듭 반복된다. 여주인공과 악한은 둘 다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알리고, 자신의 이름과 거기에 부여된 조건을 폭로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멜로드라마의 특색을 이루는 페리페티와 연극적 사건의 급변은 종종 지명행위나 그에 상응하는 것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정체성이 확인되는 순간은 흔히 드라마가 격렬하거나 반전될 때이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페리페티와 사건의 급변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인물들이 세계의 절대적인 도덕적 자질을 명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본성임을 주장하는 것으로서의 세계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아놓은 사례들이 충분히 시사하고 있듯이,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은 과장된 것이고 교훈적인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전형적인 표현법은 과장법, 대조법 그리고 모순어법이다. 그러한 표현법은 정확하게, 미묘한 차이를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순수하고 완전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음을 입증한다. ‘멜로드라마론’에 의하면, 전통적인 연극에서는 단순하고 화려하며 숭고한 양식 각각이 식별될 수 있다면, 멜로드라마에서는 어수룩한 양식까지 포함하여 숭고일 것이다. 강한 어조, 끊임없이 숭고를 표현하려는 지향은 사실 특징적이다. 찬미와 놀람이라는 극작술의 추구는 진부함과 평범함에 숭고한 갈등의 흥분을 불어넣을 수 있는 수사학을 필요로 한다.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은, 세상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가장 열광적인 기대와 같아질 수 있으며, 제대로 재현된 현실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공상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넌지시 주장한다. 세계는 정확한 제스처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그 작용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는 우주의 윤리적인 힘들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서, 언제나 스스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한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수사학은 고양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해야 하며, 그 상태란 과장이 ‘자연스러운’ 형식인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도덕적, 우주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외관상의 (자연주의적인, 진부한) 드라마밖에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과장된 동시에 비현실적인 어법과 행동양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웅장한 것으로 향해지도록 하는 이 같은 수사학은, 감정들과 도덕적인 감상들에 대해 우리가 익숙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멜로드라마는 감정이나 관념을 빚어서 만들 수 있는 실체, 즉 모두가 보고 만지도록 제공된 시각적, 촉각적인 모델처럼 다룬다. 감정은 완전히 행동화된 것으로, 우리 눈앞에 완전한 재현으로 제시된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존재의 원천을 말하고 그 동기와 관계의 이름이 제시되는 순간을, 딸이 울면서, “오 나의 아버지!”라거나 악한이 “맞아, 무구함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자는 바로 나지!”라고 말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들 영혼의 분명한 형상을 제공하는데, 그들은 태연하게 영원한 진리의 이름을 말한다. 암묵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넘쳐 말해진다. 그러한 순간들은 충만한 감정적 탐닉에의 기쁨, 우리가 심적인 생활에서 하나의 가능한 존재방식으로 인정한 것을 순전하게 발굴해냈다는 쾌감, 완전한 내적인 힘이 승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지금 멜로드라마의 수사학 그리고 그 장르의 표현상의 전체적인 기획이 억압을 넘어선 승리의 재현이라는 가설로 나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억압을 동시에 사회적, 심리적, 역사적, 관습적인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초창기 무대에서도, 여전히 ‘좀 더 고급한’ 무대에서도, 사회의 약호 내에서도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다. 멜로드라마적 발화는 검열과 조정, 완화법 등 ‘현실원칙’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돌파한다. 욕망은 존재의 충만한 상태와 일체화하면서 자신의 언어로 크게 외친다. 멜로드라마는 벤틀리와 부스가 시사했듯이 꿈의 세계의 성질을 띠고 있고, 이 성질은 멜로드라마가 ‘실제생활’에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딱 들어맞는다.
멜로드라마가 유도해내는 비평적 저항과 난처함은, 멜로드라마가 검열과 억압을 거부-비평적인 목격자 자신이 그때 제공하는 현실원칙에의 순응-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목격자에게 너무나 터무니없고 적나라하며 직접적이어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된 신원증명을 맞대면시키는 드라마 앞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쾌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사실 모종의 스캔들이 있는데, 신원이 증명되는 순간 대부분 지각될 수 있으며, 아마도 특히 악한이 그의 악행에 대한 지명이 분명해져서 마음대로 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한 순전한 파괴적인 감정이 존재해야만 하고 그 존재를 그렇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경우는 그저 자식으로서 혹은 어머니로서의 감정이 표현되는 곳에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표현적인 언어는 억압된 것의 귀환을 위한 운반자 혹은 전달자로서 기능하여, 보통의 상태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심리적인 상황이 억압되어 있는 바로 그 말을 분명히 표현한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아버지와 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관습과 경험의 복잡성을 조화시킨 낮은 음역 안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멜로드라마에서 같은 말을 내뱉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과잉된 감정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표현된 감정과 조건은 그 본능적인 순수성에 있어 거의 질리게 만들 정도이며, 너무 강한 맛이 난다. 그러나 여기가 분명 멜로드라마의 호소력과 지속성의 근본적 원천이다. 그 장르의 존재는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묶여 있다. 우리가 그 호소력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말하도록 권유받는 세계의 상상적 가능성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예의범절, 자기배반의 공포, 타자와의 조화는 더 이상 조절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억압에 대한 수사학적 돌파는 멜로드라마가 다루는 도덕적 문제들을 위치시키고 분명히 표현하려는 그 중심적 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탈신성화된 세계에서 윤리적 명령은 감상화되어 왔고 감정적 상태 및 심리적 관계와 동일화되어 왔기 때문에, 감정적 정수의 표현과 도덕적 정수의 표현은 구별이 불가능하다. 둘을 가장 적절하게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도덕 감정일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각각의 연극은 도덕적 딜레마에 관한 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하려고 하는 도덕 감정 그 자체의 딜레마에 관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연극의 결말은 미덕의 승리보다는 오히려 위대하고 담대한 인물들에게서 세계의 윤리적 힘과 명령을 발견하여 세계를 도덕적으로 읽기 쉽게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 미덕의 기호를 인지하는 드라마에서, 미덕은 자신을 억압하고 배제하고 침묵시킨 ‘원초적 장면’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여,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하고 존재의 권리를 요구한다. 박해받은 희생자가 미덕이 존경받고 인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을 적대자에게 대면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덕의 기호는 결국 억압과 부정행위로부터의 해방을 무대 위와 청중들 속에 있는 모든 증인들에게 대면시킨다. 우리는 멜로드라마가 종종 어떤 준비된 미스터리와 수수께끼를 포함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명백한 도덕적 모호함은 음모, 악, 의식적인 혼미의 결과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 모호함은 도덕성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은 모호하게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악은 처음에 분명히 표현되고 인지될 것이며, 그런 다음에 미덕의 기호는 그 억압을 극복하기 시작할 것이다. 연극 결말부에 의해, 욕망은 만족을 얻는다. 어떠한 그늘도 남지 않으며, 세계는 충만히 빛나는 도덕의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몸을 씻는다. 그러므로 미덕의 심리적인 과시, 그 표현적인 돌파는 세계가 사실 도덕적으로 판독가능하며 윤리적 정체성과 의의를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거듭해서 확신시키는데 기여한다. 탈신성화된 세계에서 이러한 확신이 멜로드라마의 중심 기능임에 틀림없다. 즉 멜로드라마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감정들을 재배치하고 재명료하여 옳은 것의 기호들을 찬양한다. 윤리적 상징들이 공공연하고 발작적으로 의문에 던져졌던 시기인 대혁명기의 초입에서부터, 멜로드라마는 초자연적인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재배치와 재명료화를 다루었다.
이는 우리가 멜로드라마를 ‘민주적인’ 예술로서, 혹은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유일한 대중적 비극”으로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디에는 탈신성화된 세계의 맥락, 특히 대혁명 이후의 풍경에서 멜로드라마의 특별한 역할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는 픽세레쿠르 연극에 대해서, “나는 종교적 숭배의 부재 속에서 침묵하는 설교자를 대신하는 그것들을 보았다”고 쓰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어려운 시기에, 일반 대중이 오직 극장에서만 종교교육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을 때, 온갖 문명의 근본원리에 대한 멜로드라마에의 적용에는 신의 섭리의 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노디에의 도덕화하는 엄숙성을 넘어서 나아간다면, 그의 통찰력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남긴다. 즉 픽세레쿠르의 작품은 사람들이 닿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은 숭고하고 절대적인 도덕적 실체에 대한 연극이며,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덕적 세계라는 것이다. 멜로드라마가 대혁명기에 태어나, 1800년 <콜리나>와 함께 성년이 되었어야 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청중과 그 심오한 주제 모두에 있어, 멜로드라마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다. 그것은 도덕성과 그 기호들의 민주화를 재현한다.
거기에는 형식의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있다. 악한은 두드러질 정도로 흔히 폭군과 압제자이다. 그들은 권력을 지니고 그것을 이용해 타인에게 해를 가한다. 반면에 무구하고 미덕을 지닌 희생자는 대부분 민주적인 세계에 속하는데, 그들이 어떤 특수한 계급의 출신이든지간에 그들은 특권보다는 오히려 가치, 그리고 선한 자의 우애를 믿는다.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이 돌파한 억압들 가운데 계급지배의 억압이 있고, 이것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소녀가 도덕적 상태에 대한 진실로써 권력을 가진 억압자에게 맞설 수 있음을 제시한다. 멜로드라마의 사회적 구조가 내재적으로 봉건적인 것으로 자주 드러날지라도, 그것은 또한 현저하게 평등주의이며 따라서 봉건적 특권을 고수하는 이는 누구라도 악한이 될 수밖에 없다. 윤리적 관계의 민주주의가 도덕성의 감상화 그리고 윤리의 근본적, 가족적, 심적 정형화의 동일화를 거쳐 간다고 시종 주장된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는 니체가 말하는 도덕관념에 의한 “노예혁명:의 또 다른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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