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정서
실제의 삶에서는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은 서로 다른 비율을 유지하며 나타난다. 반면 예술에서는 이 두 가지를 통일시킨다. 이야기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의지적으로 실현해 내는 도구인데, 이 두 가지가 통일되어 있는 현상을 일컬어 미학적 정서라고 한다.
아이디어(지적인 것)이 감정의 흐름(정서적인 것)을 타고 움직일 때 그 아이디어는 훨씬 강력하고 근본적이고 훨씬 기억에 남는 것이 된다.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쥐어준다. 실제경험은 시간이 흐른 뒤에 반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지만, 예술에서는 모든 경험이 그것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술은 비지성적이지만, 반지성적이진 않다. 지적인 논증의 방식이 아니라 감각과 직관, 감정을 통해서 관객의 영혼을 살찌운다. 작가의 지식과 판단력이나 통찰력은 예술을 예리하게 만들어 준다.
전제
창작의 과정은 전제와 주도적인 아이디어(주제), 두 가지를 한데 묶어 만들어진다. 전제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일으키는 아이디어이며,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인물의 행동과 절정에서 드러나는 미학적 정서를 통해 표현되는 이야기의 궁극적인 의미이다.
전제는 질문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방법도 한가지의 예이다. 전제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작가는 모든 경험의 순간에서 쌓아온 세계관이나 확신을 통해 전제를 발견하고 글쓰기는 시작된다.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던 그 생각이 완성된 글에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제 자체는 값진 것이 아니다. 글쓰기란 발견의 과정이어서,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원래의 생각을 버릴 수도 있다.
수사법으로서의 구조
전제(아이디어)를 통해 어떤 이야기가 완성되면, 그 이야기는 관객에서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한다. 마치 토론이 벌어지는 것처럼 설명적이고, 설득적이면 관객은 흥미를 가지기 어려운 것은 물론 절대로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작가가 가진 철학을 피력하기 위한 강단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범죄영화를 보고 관객은 <범죄를 저지르면 대가를 치른다. 는 생각을 극중 대사나 지적인 설명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범인을 처벌하는 장면에서 정서적으로 고조되어 정의의 승리와 사회의 복수를 생각하되 짜릿함을 느끼면서 생각하게 된다.
미학적 정서의 종류와 장르는 서로 연관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의미는 설명적인 대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정서적인 표현을 앞세우는 절정의 형태로 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적인 아이디어
주제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한 이야기 속에서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의미를 표현해 주는 의미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한 문장. 주제는 이야기의 근원이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야기를 구성할 때 삭제할 것과 남아야 할 것들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하나의 규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관객들이 의식적으로 사고하기 전에 인생 경험으로 결합되어 들어간다. 그런데 어떤 분명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작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관객들은 작가의 아이디어에 들어 있는 함의를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 적용시키면서 더욱더 많은 의미를 발견해 낸다. 반면 작가가 이야기 안에 많은 주제를 담으려고 할수록 관객들은 자신의 내면을 걸어 잠근다.
주제는 가치와 원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치란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러서 주인공에게 혹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 방향으로의 변화에 들어있다. 원인 이란 주인공이 변하게 된 이유에 주목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하여 전제와 주제에 관해 예를 들어보자면, 영화 < 비밀애 > 에서의 전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쌍둥이 여서 헷갈린다면" 이고, 주제는 "사랑은 착각이다" 라면, 이 주제는 주인공 연이가 변하게 된 원인이자, [부정적인 에너지]=[가치] 를 갖고 있다.
의미와 창조적 과정
전제는 어떤 곳에서든 시작 할 수 있다. 이야기 중간, 도입부, 결말 혹은 어떤 씬의 어떤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제는 이야기가 구축되어가다 그 절정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주제로 부터 이야기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부터 주제가 도출되어야한다. 어떤 아이디어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이야기의 주도적인 아이디어가 자리 잡는 곳은 절정이며, 이를 통해 작가는 자기인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의 절정은 작가의 내적 자아가 반영된 것이다.
이 절정을 통해 작가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쓰이고 있는 이야기는 그 작가를 몇 번이고 놀래어야 한다.
아이디어 대 역 아이디어
이야기는 이 주제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가치 (긍정적-부정적)가 서로 대립되고 논쟁하다가 절정에 이르러서 두 주장 중의 하나가 승리하면서 이루어진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긍정과 부정의 주장은 두 주장이 정면으로 부닥치는 위기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줄곧 반복되면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절정이 심화되고 둘 중 하나의 아이디어만 살아남게 된다.
계몽주의
이때 주의사항은 두 가치가 균등한 힘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는 가치와 대립되는 가치의 시퀀스나 장면들에도 진실성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며 때때로 더 많은 강조가 필요하다.
작가가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하는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 된다.
뛰어난 작가들은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그리고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겹들을 모두 들여다본다.
이상론자, 비관론자, 아이러니스트
1) 주도적 아이디어가 이상론적인 경우
낙관주의, 희망, 인류의 꿈을 표현하는 <상승 종결>을 가진 이야기들은 긍정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다.
2) 주도적 아이디어가 비관론적인 경우
<하강 종결>을 취하는 이야기들은 인간 문명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에 대한 부정적 전망, 냉소, 상실감 또는 불행 등을 표현한다.
3) 주도적 아이디어가 아이러니인 경우
<상승/하강 종료>의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복잡성 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정서를 동시에 지닌 양면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두 가지 모두를 표현한다.
4) 아이러니에 대해
현실이란 잔인할 정도로 아이러니한 것이며 이 때문에 아이러니로 끝맺는 작품들이 가장 긴 수명을 얻고 가장 널리 보인다. 또한 이것은 아이러니가 가장 쓰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절정의 순간에 두 가지 모두를 하나의 절정에 밀어 넣어야하며 이 두 가지가 중의적인 것이 아닌 두개의 독립된 나란한 상태여야 하고 그 다른 두 가치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와 사회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 이야기는 감정을 토대로 주제를 전달하여 때때로 그 아이디어들을 우리 안에 주입시켜 믿게끔 한다.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더러운 거짓말조차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이상적이고 권위적인 인간형은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감정을 두려워 한다. 생각은 조종될 수도 있고 조작될 수도 있지만 감정은 자발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권력을 잡은 모든 독재자들이 작가들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야기가 지닌 영향력을 고려할 때 작가는 사회적 책무라는 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작가가 사회의 분위기를 조장하고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자기 자신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한다. 정직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사회적 책임감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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