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적인 여배우 문정숙의 담배연기와 함께 영화는 시작한다. 정창화 감독의 <에라이샹>은 명문대 4학년 남학생과 술집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시위를 하다 부상을 입은 조세영은 이난희의 집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이난희는 조세영을 도와주고,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는 많은 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 장르에 대한 논의와 각 인물의 분석, 그리고 시공간적 배경(영화의 배경은 4.19혁명이지만, 왜 상해의 기억, 식민지의 기억을 불러오는지)을 통해 영화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다.
영화는 단순히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멜로드라마의 선에서는 약간 이탈해있다. <에라이샹>를 멜로드라마로 봤을 때 가장 큰 특이점은 ‘가족이 없는 가족 멜로드라마’라는 것이다. 난희와 세영 둘 모두 고아이다. 가족이 없다는 것은 계급의 차이의 문제에 있어서, 이 둘을 제약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멜로드라마 장르는 사랑에 빠진 둘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 특히 계급의 차이에 있어서는 주로 가족이 등장한다. 아직도 한국 드라마를 보면, 부유층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과 헤어지라고,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돈을 내밀고, 욕을 퍼붓는다. <예라이샹>은 이 둘을 방해하는 사람 대신 방해하는 사건을 등장시킨다. 그게 바로 일제 강점기의 기억, 식민의 기억이다. 여기에는 ‘박사장과 허상무’라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난희의 단골 고객이고, 세영이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집주인이다. 이들은 상해에서 난희의 아버지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겁탈해 딸까지 낳는다. 박사장의 첫째 딸은 난희의 이복동생인 것이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을 죽인다. 폭력이 난무하고, 법이 부재한 상황을 영화는 보여주며, 컴컴하고 어두운 느낌이 영화에 맴돈다. <에라이샹>은 식민의 기억을 불러오면서, 필름 느와르의 장르적 관습을 가진다.
영화를 필름 느와르로 봤을 때, 세영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필름 느와르는 남자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인물로 그려진다. 세영은 60년대 명문대 법대생이었으므로 최정상에 있는 지식인층이다. 하지만 세영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위를 하다 부상을 당한 장면을 제외하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에라이샹>은 동시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사건이 생겼을 때 세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법의 부재와 폭력이 지배한 세계는 남성성의 부재와 함께 나타난다. 모든 사건의 근원인 박사장을 죽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여성인 난희다. 난희는 영화에서 팜므파탈의 매력을 뽐낸다. 밤에만 피고, 밤에만 향기를 내는 꽃인 에라이샹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에라이샹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악의 근원인 박사장도 마찬가지로 에라이샹을 좋아한다. 밤에만 피고, 밤에만 향기를 내는 꽃. 박사장에게 이 ‘밤’의 의미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에라이샹은 난희가 술집에서 쓰는 가명이기도 하다. 난희의 상황과 심리, 그리고 난희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 왜 영화는 남성성의 부재와 여성의 힘을 강조하는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과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 4.19혁명이고, 영화가 불러오는 기억은 식민의 기억, 상해의 기억이다. 영화가 공개되는 시기는 1966년이지만, 영화는 1961년에 일어났던 5.16 쿠데타를 배제시킨다. 5.16 쿠데타를 배제한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아버지가 부재한 세대임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정당한 권리로 정권을 획득하지 않고, 쿠데타로 정권을 가로챈다. 아버지라고 할 지도자가 없는 세태를 영화는 남성성의 부재를 통해 보여준다. 세영은 법학도지만, 영화 내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남성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 대신 팜므파탈적 여성이 과거의 매듭을 끊는다. 더 나아가, 상해에 있었던 살인과 겁탈, 도적질 등 법의 부재와 폭력이 지배한 세계는 4.19 혁명이 일어나는 1960년에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4.19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떨어져 있는 시공간의 기억이 오버랩된다.
비슷한 의미에서 친일파가 연상된다. 독립된 후에 바로 청산되어야 했던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고, 오히려 이승만 정권에서 탄력을 받아 박정희, 그리고 지금까지 친일파들의 힘이 한국을 장악한다.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지점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방송 이론 및 비평 > 영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 라브렌티 감독의 <고려사람> 리뷰 (0) | 2020.11.22 |
---|---|
영화 <오발탄> 리뷰: 영화의 리얼리즘에 관하여 (0) | 2020.11.22 |
장률 감독의 <경계> 리뷰 (0) | 2020.11.22 |
김기영 감독 영화 <하녀> 리뷰 (0) | 2020.11.21 |
영화 <씻김>, <황홀경> 리뷰 (0) | 2020.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