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의 <경계>는 탈북 모자(순희와 창호)가 몽골의 사막을 통해 탈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몽골의 한 집에는 항가이라는 남자가 나무를 심으며 살고 있으며, 그의 아내와 딸은 딸의 치료를 위해 도시로 떠났다. 그러던 중, 탈북 모자는 항가이를 우연히 찾아온다. 그렇게 탈북모자와 항가이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는 로드무비로서 스펙터클한 과정이 아닌, 몽골의 한 집에 정착하며 생활하는 일상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경계>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경계를 보여준다. 크게는 인종, 민족 간의 경계, 작게는 가족 간의 경계가 있다. 하지만 제목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경계를 가지는 동시에 그 경계를 허문다. 영화가 경계를 어떻게 쌓고, 허무는지 살펴보며 정치적 표현과 미학적 표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영화는 인종적 경계로 얘기할 수 있는, ‘언어’라는 큰 경계를 긋는다. 항가이와 탈북 모자는 만남부터 이별까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몽골어와 조선어로 이야기한다. 처음 만났을 때, 항가이는 모자(순희와 창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른 채 받아준다. 하지만 언어적 경계는 일정 부분 음악으로 허물어진다. 항가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창호를 보고, 모자(순희와 창호)가 탈북자라는 것을 안다. 모자의 정체성은 아리랑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음악은 탈북 모자의 정체성 이외에, 몽골 군인의 정체성도 확인한다. 몽골군인은 몽골 전통음악을 부르며, 언어가 아닌 리듬과 박자로 소통한다. 이렇게 음악은 언어적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는 계기가 된다. 소통을 넘어선 사건을 위한 발단이 되기도 한다.
항가이의 가족이 떠난 후 탈북 모자가 들어오며, ‘가족’이라는 경계가 생긴다. 항가이가 탈북 모자를 받아준 것은 자유로운 유목민의 특성일 것이다. 하지만 항가이가 탈북 모자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항가이는 모자가 탈북자라는 것을 안 후, 모자를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부른다. 손님은 환대와 보호의 대상인 것인 것이다. 항가이는 탈북 모자를 자신에게 팔라고 하는 사람한테 총을 겨누며 지켜준다. 순희 또한 소똥 모으기, 나무 심기, 안주를 내오는 것 등으로 항가이의 유목 생활에 적응한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을 통해 경계를 넘어선다. 이런 보호와 배려 속 에서 항가이와 탈북 모자는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또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
탱크와 군인이 나오는 장면은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게 했다. 실제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유목민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환상으로 보였다. 탱크가 지나가는 씬은 항가이와 탈북 모자 모두 한 번씩 봤다. 각자 탱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현실성과 비상사태를 느끼지 않았을까. 특히 아들 창호가 탱크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어두운 밤에, 파란 색감, 그리고 탱크의 불빛으로 구성되는 화면은 마치 꿈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탱크의 존재는 군대의 존재이다. 즉 지금 어디선가는 전쟁을 하고 있다. 전쟁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유목민의 삶을 불안정성의 위에 놓고, 탈북자의 삶은 더 심각한 불안정성 위에 있을 것이다.
비상사태와 불안정의 상황은 남한에서 온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비슷하다. 영화촬영현장은 감독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전체적 맥락에서 비현실적이고 불안정해 보인다. 즉 전쟁과 영화촬영현장은 자유로운 유목민의 삶과 대비된다. 하지만 권위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탈북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 설정된다. 이런 애매한 위치가 또 다른 경계를 만든다.
아들 창호가 엄마 순희에게 묻는다. “엄마 항가이 아저씨는 왜 여기에 나무를 심나요?” “초원을 보호하자는 거야” 창호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왜 심어요?” 순희는 답하지 못하고, 창호가 “초원도 보호를 받는데, 우리도 보호를 받아야 되잖아요.”라고 말한다. 순희가 답하지 못한 답을 창호가 대신 얘기한다. 순희의 나무 심기 일은 보호받고 싶은 마음을 투영하고, 사막 같은 세계에서 초원을 만들어보자는 이상, 희망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항가이의 집을 떠나기 전, 죽은 나무를 불태우는 장면은 인상 깊다. 초원을 만들어보려 하지만, 좌절하는 탈북자의 불안정성을 연상하게 된다.
과연 모자에게 희망이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말의 희망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촬영 미학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의 헨드헬트와 패닝이 특이했다. 거의 모든 장면을 픽스해놓고 찍지 않고, 헨드로 찍으면서, 패닝을 한다. 그러다보니 패닝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카메라의 떨림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촬영이 불안정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자체도 탈북자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핸드로 찍는 불안정함이 아닌, 픽스를 해놓고 안정적으로 찍었다. 고정하고 찍은 패닝은 모자의 안정화된 삶을 기원하는 듯했다.
푸른 솔은 항가이가 나무를 심을 때마다 하나씩 나무에 매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파란 물이 들어있는 물병은 천막이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해주는 전통의 상징이다. 마지막 장면, 다리에 휘날리는 푸른 솔들은 앞에서 보았던 푸른색을 연상시킨다. 푸른 솔은 모자의 미래에 일말의 희망을 남기며,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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