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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송 이론 및 비평/영화의 이해

들뢰즈와 시네마 : 양적 vs 강밀한 몽타주

들뢰즈는 (베르토프에게서 찾았던) 물질 변증법의 유기적 구성의 중단을 위한 추가적 수단을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두 그룹의 영화 제작자들의 몽타주 경향 속에서 찾는다. 비록 이 그룹은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로 대비되지만, 들뢰즈는 운동에 대한 양적 접근과 강밀한 접근 간의 대립에 의해 그들의 차이를 정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프랑스적 접근에선 가변적인 현재는 수적 통일성으로 취급되고, 독일의 경우는 강밀한 정도로 다뤄지는데, 열린 전체의 수준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향은 칸트의 수학적 숭고와 역동적 숭고로 대립된다. 전자는 수의 무한함이고 후자는 역량의 무한함이다. 


들뢰즈는 프랑스의 몽타주 경향을 “일종의 데카르트주의”로 기술하는데, 그것은 운동의 양과 그것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계량적인 관계들에 대한 지배적 이권에 의해 특성화된다. 그것은 유기적이거나 변증법적인 구조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이미지들의 광대한 기계적인 구성을 생성한다. <충실한 마음>에서 박람회, <엘 도라도>에서 무도회, <말돈>에서 파랑돌 등과 같은 장면들에서 들뢰즈는 움직이는 대상들로부터 “주어진 공간 속에서의 최대의 운동량”을 추출해 내려는 노력을 발견한다. 들뢰즈는 운동에 대한 기계적 접근이 프랑스 학파의 기계의 이미지 속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입증된 것을 발견한다. 하나는 자동기계, 이건 발레 동작 그 자체가 운동을 횡단하여 순환하는 자동적 발레이며, 다른 하나는 증기 혹은 연소 엔진으로서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운동을 산출하고, 기계론적인 것들과 생명적인 것들, 내부와 외부, 기계공과 힘을 긍정하는 강력한 활동적인 기계이다. 독일 표현주의자 영화들의 자동장치와는 달리, 프랑스의 자동장치는 규칙적이고 단순한 기하학적 배열들로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유형의 기계(증기, 연소 엔진)에서 프랑스 감독은 소비에트 학파와 다르다. 소비에트 학파는 다양한 산업 기계가 인간과 함께 변증법적인 통일로 본다. 프랑스 감독의 경우는 엔진은 운동량을 결정하고, 기술자는 기계의 ‘영혼’ 속에서의 운동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강스의 영화 <바퀴>에서 열차 잔해 이미지를 염두에 두는데, 기관차의 가속 운동이 기술자 시시프의 복합적인 열정과 결합하여 인간 영혼을 지닌 비극적 기계를 형성한다.

 

기계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프랑스 감독 사이에서 운동에 대한 만연된 표현법을 나타낸다. 프랑스 감독은 ‘포토제니’, 촬영하기에 특별히 적절한 것으로 만드는 대상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프랑스 감독은 특정한 대상이 촬영되면 질감이 증대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신비’와 조우했다. 들뢰즈는 그 신비가 그들을 가변적 현재의 간격을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운동의 최대량을 이미지 속에서 산출하는,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변화하는 수적인 통일성”으로 보는 착상을 지니게 됐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수학적 수는 우리가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착상하도록 허용한다고 진술한다. 칸트는 수를 통한 거대함의 측정으로 생성된 숭고를 “수학적 숭고”라고 부른다. 수학적 숭고는 감각의 측정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들뢰즈는 프랑스 학파의 양적인 수적 단위들, 가변성의 현재의 간격들은 모든 측정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많거나 또는 초과하여, 단지 사고하는 영혼에 의해서만 착상되는 무한한 전체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은 프랑스 학파에서 지배적인데, 물질적 요소들의 상대적인 기계론적 운동이 개념적이고, 정신적인 전체의 절대적인 운동과 공존한다.

 

프랑스 학파에게서 상대적인 양적 운동이 향하는 이상은 하나의 전체로 동시적으로 파악된 중첩적인 연속적 순간들로 구성된 무한의 이상이다. 들뢰즈는 “동시주의의 이상”은 “결코 프랑스 시네마에 따라붙어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고, 회화, 음악, 심지어 문학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는 강스의 <나폴레옹>에서의 삼중 스크린 사용에서 프랑스 학파의 경향을 본다. 다양하게 중첩되고 병치된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동시성, 광대무변, 무한성인데, 정신 속에서 그것의 전 역사 혹은 그것의 변화, 그것의 우주를 표현하는 운동의 절대적 양에 대한 순수 사유를 탄생시키면서 그것은 상상력을 무기력으로 축소시키고, 그것 자체의 한계를 직면하게 한다.” 강스의 기술적 혁신은 프랑스 학파 전체에 암시된 시간의 관념을 명시적으로 가시화한다. 즉 물질적인 수적 단위들과 영적 동시성의 이원론인데, 그것으로부터 “수학적-정신적, 외연적-심리적, 양적-시적” 몽타주의 개념이 발생한다.

 

들뢰즈는 프랑스 학파와 독일의 표현주의는 한 항목씩 대립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빛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 두 이론을 구별하는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자는 고딕 양식의 비유기적 생기론을 통하지만 구성의 유기적 개념과 단절한다. 로트 아이스너는 표현주의 영화들 속에서 대상과 자동장치에 대한 강박뿐만이 아니라 배경, 특히, 건물, 거리, 공간을 “그것들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역동적인 실체들로 대하는 접근들을 주목한다. 이런 접근을 그녀는 “무기체의 생기를 창조하려는 정신적 불안”이라는 고딕 양식의 보링거의 개념과 결합한다. 보링거는 고딕 예술의 본질을 지그재그형 선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사물 사이를 통과하며 사람, 동물, 식물, 금속, 광물 안에 신경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이 선은 또한 표현주의적 선인데, 이 운동은 공간에 대해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대각선들, 극단의 앵글들, 그리고 톱니 같은 모서리의 역동적인 기하학을 발생시킨다.

 

그 생명력 있는 힘의 운동은 빛에 대한 독일 표현주의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운동 이미지는 빛 이미지이다. 그러나 빛이 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프랑스 학파에서 빛은 운동의 기능으로 착상된다. 즉 “빛 그 자체의 이동성을 통해 발광 형태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조적으로 독일 표현주의에서는 빛은 “강밀도의 강력한 운동, 전형적인 강밀한 운동”으로 다루어진다. 괴테적인 빛의 개념이 지배적인데, 빛과 그림자는 영속적인 갈등 속에 있는 분리된 무한한 힘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속에서 빛과 그림자는 갈등 속에 있는 두 가지 분리된 실체와 같다. 각각의 빛의 색조는 어둠과 관련한 강밀도의 등급이다. 그림자와 빛의 힘의 대치로부터 표현주의 쇼트의 전형적인 구성적 구조들이 유래한다. 즉 흑과 백의 변동적이고 불안정한 명암의 혼합만이 아니라 견고한 대각선, 날카로운 홈, 그리고 명암의 현저한 대조 등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속에서 빛과 그림자는 동작 속의 힘이다. 즉 대상, 빌딩, 풍경, 분위기, 사람은 역동적 힘인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배열 속에서 상호 접속하는 강밀한 벡터다. 이런 운동 이미지의 배열은 그것의 시간적 구조를 빛과 그림자의 힘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이끌어낸다. 독일 표현주의 속에서 전체는 무한한 강밀화의 지속이다. 이런 지속의 암시는 빛의 특정한 효과 속에서 발견된다. 괴테의 색체 이론에서 최대 강밀도의 지점은 불그스레한 자줏빛을 띠며, 황색과 청색이 더 강밀하게 될 때, 그것은 반사 혹은 미광이 스며든다고 관찰한다. 그는 붉은 자주색은 일종의 “광택의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색채를 수반하는 색채 중의 색채라고 결론짓는다. 들뢰즈는 이 빛을 역동적 숭고의 예로 간주한다. 그것은 수학적인 수에 의해서가 아닌 압도적인 힘에 의해 생성된 숭고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역동적 숭고 속에서 자연을 초월할 수 있고, 압도적 힘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율성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강밀도의 무한한 등급까지 상승된 그림자와 빛의 힘은 타오르는 불과 초자연적이 빛이 된다. 그리고 이런 강밀한 불/빛 힘의 무한대 속에서 우리는 독일 표현주의의 지속의 열린 전체를 발견한다. 프랑스 학파의 열린 전체 속에는, 요소들의 개별적 배열의 기계론적 운동은 동시적으로 상호현존하는 운동의 단일하고 무한한 차원 속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독일의 열린 전체 속에는 개별적 운동의 시간은 무한한 총체성 속에 포함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분산된다. 빛과 그림자는 역동적인 힘이다. 그리고 힘은 무한대로 올라갈 때, 폭발적인 역량이 된다. 따라서 만약 미국과 소비에트의 전체가 한쪽에서는 무한한 과거를 향해 열려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간의 나선 상승이라면, 그리고 만약 프랑스의 전체가 동시적 시간의 나선이라면 독일의 전체는 끊임없이 올라감에 따라 그 저부를 계속해서 밀어제치는 피라미드의 이상적 정상이다. 

 

들뢰즈의 요점을 놓치기 쉽다. 요점은 몽타주가 언제나 지속의 열린 전체의 개념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린 전체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다루는 데에서 전체적으로 네 가지의 넓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그것의 각 양상으로 가변적 현재의 최소치 순간으로 축소되고 무한대의 상응하는 형식 속으로 팽창한다. 미국적 경향에서 최소치는 단순한 간격인데, 그것에 상응하는 최대치는 부분들의 제한 없는 증대의 동일하게 단순한 과정을 통해 배치된 유기적인 무한대이다. 소비에트에서 최소치는 질적인 도약이고, 최대치는 끊임없는 생성적 성장의 변증법적 무한대이다. 프랑스의 경우 수적 통일성이 최소치이고, 그것에 상응하는 최대치는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상호제시되는 모든 기계론적 운동의 이상적인 무한대이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강밀도 등급이 최소치이고, 그것의 최대치는 계속 축소되는 힘의 단일한 집중 속으로 수축되는 모든 강밀한 힘들의 이상적인 무한대이다. 

 

들뢰즈가 단순히 플롯과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 사실상 그는 이런 요소들로부터 플롯과 주제를 형성하는 전체의 내재적 착상을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평행적 몽타주가 모든 영화에서 공통된 기술로 고려될 수 있을지라도, 소비에트의 경향에서 그것은 대립의 몽타주로서, 독일의 경우는 대조의 몽타주로 기능한다. 중요한 건 개별적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사용을 지시하는 전체다. 들뢰즈가 쇼트의 분석과 몽타주의 분석을 치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전체가 몽타주에서와 같이 쇼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식적 시간의 부동적 절단과 지속의 동적 절단 양면을 지닌 쇼트의 이중적 본성은 프레임들, 쇼트들, 그리고 몽타주 사이의 상호 연결을 보증하는 것이다. 쇼트는 운동이미지이다. 그리고 운동이미지는 언제나 지속의 전체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