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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송 이론 및 비평/영화의 이해

들뢰즈와 시네마 : 프레임과 쇼트

 

운동을 하나의 공간 용기 속에 담긴 분리된 대상들의 위치 변호로 보는 것(운동에 대한 닫힌 집합적 관점)과 그것을 관계들의 열린 총체성의 질적인 변형으로 보는 것(열린 전체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가능하다. 이때 운동은 닫힌 집합들과 열린 전체 사이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즉 닫힌 집합들/(집합들과 전체 사이의 매개체로서의) 운동/지속의 열린 전체, 그리고 부동적 절단들/동적 절단들/지속의 열린 전체. 닫힌 집합들/열린 전체라는 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 운동이 집합 안에서 어떻게 참작되는가에 따라 닫힌 집합이 부동적 절단으로 기능하거나 동적 절단으로 기능한다. 이에 따라 들뢰즈는 프레임, 쇼트, 몽타주에 접근하는데, 이건 모든 종류의 영화에 현존한다. 

 

시네마의 "프레임"은 요소들의 닫힌 집합의 범위를 정한다. "쇼트"는 시간 속에서 지속하는 요소들의 불연속적인 집합이다. 그리고 "몽타주"는 쇼트들을 지속의 열린 전체가 영화를 통해 작용하는, 실제로 연결시키는 자르기와 붙이기의 과정으로 영화 전부를 형성하는 수단이다.

프레임과 쇼트

카메라는 언제나 세계의 한 부분을 프레임화하고, 한 구획의 공간-시간을 분할한다. 프레임된 이미지는 스크린(프레임들의 프레임) 위에 영사된다. 프레임된 이미지는 동일한 스크린 공간을 채우는데, 이런 점에서 스크린은 “아무런 척도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통된 척도”를 제공한다. 이러한 척도는 방향을 잃게 하는 경향이 있다. 카메라의 프레임은 한 구획의 세계를 그것의 주위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스크린의 프레임은 이질성의 구획들을 시간적으로 병치시키기 때문이다. 즉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프레임은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보증한다.” 들뢰즈는 프레임화한 이미지의 다섯 가지 특징을 확인한다.


1) 프레임에 의해 분리된 요소들의 닫힌 집합은 정보를 제공한다.

 

2) 이미지의 경계를 한정하는 것으로서의 프레임 그 자체는 기하학적(수평적, 수직적, 대각선적 좌표의 고정된 구성의 격자) 혹은 역동적(그리피스의 아이리스 쇼트 등)으로 기능한다.

 

3) 프레임에 의해 포위된 요소들은 별개의 부분들이지만, 또한 단일한 구성의 성분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레임은 요소들을 동시에 분리하고 결합한다. ex) 드레이어, 독일 표현주의적 배열, 서부극 풍경 – 기하학적 부분 / 안개, 유체, 그림자, 파동 이미지 – 역동적 부분

 

4) 모든 프레임은 ‘프레임화의 앵글’, 즉 프레임된 이미지를 쇼트로 만드는 공간에서의 위치를 함축한다. 프레임의 내재적 시점은 ‘정당화되거나’ 혹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어떤 쇼트가 서사적, 실용적 용어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탈프레임화’라고 부를 수 있다.

 

5) 프레임은 프레임된 이미지 너머의 “화면 밖 영역”만이 아니라 닫힌 집합 속의 실체들의 영역도 또한 필수적으로 결정하면서 포함하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자신이 “상대적 화면 밖 영역”(화면 밖 영역이라는 공간적 개념)에 더하여 “지속의 절대적 화면 밖 영역”을 구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어떤 프레임이든지 그 안에는 두 가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이 존재한다. 프레임된 이미지와 화면 밖 영역 사이의 연속성이 크면 클수록, 그 이미지는 더 많이 정상적인 공간과 시간에 속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 지속의 조각으로는 더 적게 경험될 것이다. 반대로 이미지가 상대적인 화면 밖 영역으로부터 더 많이 분리되면 될수록, 절대적 화면 밖 영역의 동요하게 하는 ‘내존’이 커질 것이다. 

 


이런 구별은 곧 들뢰즈를 쇼트에 관한 논의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쇼트는 지속의 동적 절단의 절대적 운동을 표현하면서 부동적 절단의 상대적 운동을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영어로 ‘쇼트’와 ‘테이크’ 사이의 구별이 가능하지만, 프랑스어로는 쉽게 할 수 없다. 쇼트에 대한 프랑스 용어인 플랑(plan)(계획, 평면)은 작가들이 행동의 평면 사이의 연속성을 계속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 확립하는 것을 말했다. 들뢰즈에게 플랑은, 고정된 것이든 트래킹이든 연속적인 운동을 형성하기 위해 편집된 고정된 앵글의 단일한 테이크, 단일한 트래킹 쇼트, 또는 쇼트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플랑은 영화 한 편 전체를 하나의 플랑-세캉스(시퀀스 쇼트, 단일한 쇼트로 촬영된 한 장면)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중요한 건 운동과 플랑의 관계이다. 플랑은 “공간 속에서 확장하는 집합들의 요소들의 이동, 지속에서 그 자체를 변형시키는 전체의 변화이다.” 즉 플랑은 “집합의 프레임화와 전체의 몽타주 사이의 매개체”이다. 프레임은 공간적 요소들의 닫힌 집합을 분리시키고, 몽타주는 시간적 전체를 조립하며, 각 플랑은 운동을 표현하면서 요소의 공간적 재설정을 표명한다. 


히치콕 <프렌지>의 한 시퀀스. 플랑 속에서 지속은 그 자체를 분할하여 분리된 부분으로 만들고, 동시에 그것을 단일한 분할할 수 없는 다양체로 계속 통합한다는 점이다. 플랑에서 운동은 ‘분해되고’ ‘재구성되며’ 국부적 배열들로 분열되고 넓은 패턴들로 결합되는데, 그 배열들과 패턴들은 확인할 수 있는 형식적 모양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면, 히치콕 영화는 포괄적인 형식적 통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로프>의 직선, <사이코>의 절선, <현기증>의 나선. 이러한 운동들은 또한 개별적 장면과 시퀀스를 구조화한다.


플랑은 운동 이미지이다. 그것이 변화하는 전체와 운동을 연결하는 정도로 그것은 지속의 동적 절단이다. 우리는 운동을 안정된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시네마적 이미지 속에서 신체로부터 유리된 운동을 본다. 이러한 동작을 볼 수 있게 한 장치가 카메라 운동과 몽타주에 설정된 쇼트 사이의 운동이다. 다양한 기계적 수단이 카메라를 이동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동 카메라는 대상들로부터 순수 운동을 추출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사하게, 쇼트 사이의 연속성은 편집 때 빈틈없이 유지된다. 몽타주를 통해 생성되는 운동은 대상을 벗어나는 운동으로 남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초기 영화의 고정된 쇼트는 “순수 운동 이미지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경향은 공간상으로는 카메라의 동원에 의해 혹은 시간상으로는 이동하는 플랑이나 단지 고정된 플랑의 몽타주에 의해 지각 불가능하게 실행되었다.”


동적 절단으로서 플랑은 지속의 전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체들, 부분들, 양상들, 차원들, 거리들과 이미지 속에 한 앙상블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각각의 위치들”을 변이 속에 설정한다. 어떤 영화든지 그것은 시간 속에서 복합적인 플랑들로 나뉘는데, 각 플랑은 잴 수 없는 원근법을 지닌다. 각 플랑은 운동의 특정한 단면이므로, 플랑은 시간적 원근법을 제공한다. 이때 각 원근법은 역동적이며, 부단한 변화 속에 있다. 들뢰즈는 부단한 주조를 변조라고 부른다. 각 플랑은 일종의 변조기인데, 단순히 쇼트 속에 실체들의 다양한 운동을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화, 카메라 운동, 그리고 몽타주의 기술을 통해 변이 속으로 그것을 능동적으로 설정한다. 

플랑은 하나의 시간적 원근법이고, “의식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시네마적 의식은 “우리도, 관객도, 주인공도 아니고, 때로는 인간적이고, 때로는 비인간적이거나 초인적인 카메라이다.” 들뢰즈는 의식은 사물들 속에 있고, 무생물의 파악 속에 잠재태적으로 현존하며, 다양한 유기체적 형식들 속에서 살아 있는 ‘비결정의 중심들’로 현실태화한다고 주장한다.